불교의 핵심 연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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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핵심 연기법▒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법(法)은 내가 지은 것도 아니고,
다른 존재가 지은 것도 아니다.
이것은 영원히 존재하는 법칙으로,
나는 오직 이것을 발견했을 뿐이며,
나는 이 법을 깨달아 여래가 되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으신 내용, 부처님을 부처님으로
불리게 한 이 법(法)은 대체 무엇일까요?
흰두교나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는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기반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는 모든 것은 변하고 있다는 사실과(諸行無常),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다(諸法無我)는 현실의 통찰에서 시작합니다.
이러한 현실통찰에 대한 가르침을 우리는 삼법인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또는 열반적정)이라고 부릅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것은 어우러져 흘러가는 무상한 속에 항상
내재(常住)된 "법칙"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변화하고 운동하는 과정속에만 존재한다는 현실통찰도
중요하지만,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변화에 상주하는 법칙성입니다.
이 법칙이 바로 연기법(緣起法)이었던 것입니다.
연기를 풀어쓰면 "연(緣)하여 결합해서 일어난다(起)"라는 뜻입니다.
당신은 인연이라는 말에 익숙하니,
그 단어를 써서 다시 풀이하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의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현상과 모든 존재는 "
인연(緣) 따라 생긴다(起)".
연기의 기본공식은 초기경전인 아함경에 표현된 대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로서
아주 간결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불교)은
인간과 일체중생의 생ㆍ로ㆍ병ㆍ사ㆍ우ㆍ비ㆍ고ㆍ뇌의 모든
"고통"에 대한 근본적이고 세상에는 다시없는 최상의 치유책입니다.
네란자라(니련선하) 강가의 보리수 나무 아래에 평평한
돌이 있었습니다.
그 돌위에 부드럽고 깨끗한 풀을 푹신하게 깔고 앉은 한 사나이는
"도를 얻지 못하면 이 자리에서 죽으리라"는 굳은 결심을 하였습니다.
풀 방석(금강보좌) 위에 앉아 선정에 든 채 밤을 새우며 고통의
원인을 끊임없이 추적하던 이 진리의 영웅은 마침내 고통의
최초원인으로 진리에의 무지 즉 무명을 발견하였습니다.
바야흐로 새벽별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인류역사상 아니 우주 역사상 최대의 영웅(大雄)이랄 수 있는
이 사나이는 무수한 생 동안 그를 가두어두었던 생사의 감옥을
부수는 계기를 맞았습니다.
고통의 근원은 무지였습니다.
고통을 준 범인은 바로 연기법의 실상을 직시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무명(無明)이었던 것입니다.
무명은 자아와 타아를 나누고, 존재와 비존재를 나누고,
영혼과 육체를 나누고,
세계와 자신을 나누는 분별심의 근원이었습니다.
이렇게 나누고 차별하는 마음은 좋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갈망과
집착을 품고, 나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혐오와 편견을 불러일으키고,
이렇게 자꾸만 연기하여 일어나는 집착과 혐오가 마침내 거대하고
견고한 생사윤회를 만들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타! 마 싣다르타라 불리던 이 사나이는 깊은 선정 속에서
모든 것이 연기하는 도리를 관찰하여 무명을 멸함으로써,
무명이 연기해 놓은 모든 생사윤회와 번뇌를 멸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어둠은 빛이 비치면 흔적없이 사라져버립니다.
어둠이 사라지면 저절로 밝음(明)이 드러납니다.
이 밝음이 원래의 실상이자 여여한 진리의 실상이었던 것입니다.
이 위대한 영웅(大雄)은 마왕 마라(Mara)의 협박과 핍박,
그리고 미녀들의 유혹을 정복하고 마침내 미증유의
증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을 이루었습니다.
성도(成道) 직전의 마왕의 핍박은 마지막 남은 습의 정화를
상징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형언할 수 없는 기쁨(法悅)속에 젖어 며칠을 보내신 후,
법열의 자리로터 부처님은 몸을 일으키셨습니다.
다시 중생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는 자비의 빛이 움직이가
시작한 것입니다.
범천의 권유 때문에 중생에게로 돌아오셨다는 신화는 아름다운
이야기이기는 할 망정 부처님에 대한 진실은 아닙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삶의 진짜 의미를 모르고 살아가는 중생들을
어떻게 밝은 세계로 이끌어낼 것인가에 대한 고심이 범천(梵天)의
권청신화로 상징되어 나타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기경전에 나타난 가장 단순한 연기법은 12연기법이지만,
이 연기법은 훗날 상좌부불교에 반기를 들고 출현한
대승불교에 의해 더욱 더 심화되어졌습니다.
반야공(중관사상)이나 유식학 등도 모두 연기법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현재 접하고 있는 불교에는 그러한 알맹이가 사라지고,
대신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알음알이, 논쟁을 위한 논쟁,
공을 위한 공, 깨달음을 위한 깨달음으로 생각들이 흘러가는
현상들이 항상 안타까왔는데, 오늘 이렇게 무거운 마음을
털어내니 얼마간은 홀가분합니다.
단순한 것은 심오합니다.
부처님을 졸졸졸 따라다니며 시봉하던 제자 아난이 말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연기법은 그렇게 심오한 뜻이 없는 듯 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그런 말하지 말아라. 연기는 매우 심오한 법이니
보통 사람이 능히 깨칠 수 있는 법이 아니다."(증일아함 46권)
이 연기법 속에서 오온ㆍ12처ㆍ생로병사를 여의는 모든 법이
모두 짜여지게 되고, 인과법칙ㆍ인연화합ㆍ모든 불교적 개념들이
연기법 속에 포섭되는 것입니다.
또한 연기법은 중도(中道)의 이론적 근거가 됩니다.
세간의 집(발생)과 멸을 바로 보면 유ㆍ무의 분별심을 여의게
되는 것입니다(잡아함 10권).
또한 연기법은 인과응보 또는 업보라는 인간존재의
법칙이 되어 나타납니다.
또한 연기법은 인연화합으로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흘러가는 우주의 존재법칙이 되기도 합니다.
연기법에서 말하는 일체존재의 상의상관성
(서로 의지하고 서로 관계맺음)은 "관계" 속에서만 우리의 삶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달라이 라마가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삶의 터전인 환경과 지구의
생태계에 대해 전세계에 끊임없이 호소하고 있는 "보편적인
책임의식"의 근거도 바로 이 상의상관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만이 인간이 됩니다.
관계가 없다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오취온이 일시적으로
머무르는 집합체에 불과합니다.
관계가 멀어질 때 우리는 슬픕니다.
관계가 다가올 때 우리는 기쁩니다.
당신이 존재하지 않을 때 나의 ! 존재도 사라집니다.
당신이 바라볼 때 그것은 거기에 존재합니다.
당신이 바라보지 않을 때 일체존재는 사라집니다.
까마득히 먼 별이 태어나서 죽었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존재합니다.
당신의 고통은 나와 무관하지 않으며, 나의 행복도 당신의
도움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영혼이니 생명이니 하는 것도 불교에서는 연기법에 의한
오온(색ㆍ수ㆍ상ㆍ행ㆍ식)의 인연화합에 의해 일시적으로
생겨난 것으로 봅니다.
영혼이나 생명은 영구 불변한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에 의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나 생명을 다룰 때 중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영혼의 실체가 아니라,
업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도 연기법에서 나옵니다.
현대문명에서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인간복제의 문제도 영혼의
실체성 여부가 아니라, 인간이 짓는 업과 그로 인하여 인간이 받을
과보를 받는 카르마의 측면에서 검토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속담은 연기법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속담입니다.
당신이 볍씨를 뿌리면 달과 별과 물! 과 바람과 태양과 당신의 땀,
기타의 모든 것이 인연화합하여 벼를 키워 마침내 추수하게 만들며,
그 볍씨는 다시 인이 되어 다른 과를 만드는 과정을 겪습니다.
선인(善因)을 심으면 선과(善果)를 얻습니다.
악인을 심으면, 그 결과를 받아야 합니다.
연기법은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해지는 것이 아닌 엄연한
흐름 속의 법칙입니다.
책임을 지지 않으려면 애초에 책임질 원인행위를 하지 않아야 하며,
어떤 행위를 했을 때엔 당당히 그 결과를 수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달이 지구를 돌면서 밀물과 썰물이 생겨납니다.
만약 당신이 바닷가에 의지하여 사는 어부라면 밀물과 썰물의
흐름에 맞춰 어부의 삶을 영위해 나가야 합니다.
보름달이 뜨는 팔월 한가위는 가족들이 모여 조상께 감사를 올리고
서로간의 애정을 확인합니다.
태양과의 관계 속에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이 생겨납니다.
당신의 그 일상적 삶 속에는 당신과는 전혀 무관한 듯 보이는
달과 태양, 심지어 우주의 가장 먼 곳에 있는 원자 알갱이 하나도
관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현대식 교육이 전문가양산에만 초점! 을 둘 뿐,
전인교육으로 흐르지 못했기 때문에 청소년범죄가 급증합니다.
종교가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더욱 더 소외되어 가고,
물질과 문명의 노예가 되어 갑니다.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한 인간의 마음속?자비의 서원을 세우고 관세음보살의 마음을
구현시켰기에,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이 됩니다.
일체중생, 심지어 지옥중생까지도 모두 다 구제하지 못할 바에는
결코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당신이 서원하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당신 자신이 바로 지장보살의 화신이 됩니다.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연기하는 현상은 본질적으로 공입니다.
그럼에도 굳건한 실체로 여기는 마음은 전도된 망상이자,무명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신신당부하신 제일의 급선무가 바로
무명의 제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 무명을 걷우어 내고 밝은 천지에 나서서 "空 속의 연기", 즉
"텅 빈 충만", "본래무일물", "본래청정"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옮긴글]
부처님 참뜻을 깨달으시어 "참 나"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_()_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법(法)은 내가 지은 것도 아니고,
다른 존재가 지은 것도 아니다.
이것은 영원히 존재하는 법칙으로,
나는 오직 이것을 발견했을 뿐이며,
나는 이 법을 깨달아 여래가 되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으신 내용, 부처님을 부처님으로
불리게 한 이 법(法)은 대체 무엇일까요?
흰두교나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는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기반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는 모든 것은 변하고 있다는 사실과(諸行無常),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다(諸法無我)는 현실의 통찰에서 시작합니다.
이러한 현실통찰에 대한 가르침을 우리는 삼법인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또는 열반적정)이라고 부릅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것은 어우러져 흘러가는 무상한 속에 항상
내재(常住)된 "법칙"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변화하고 운동하는 과정속에만 존재한다는 현실통찰도
중요하지만,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변화에 상주하는 법칙성입니다.
이 법칙이 바로 연기법(緣起法)이었던 것입니다.
연기를 풀어쓰면 "연(緣)하여 결합해서 일어난다(起)"라는 뜻입니다.
당신은 인연이라는 말에 익숙하니,
그 단어를 써서 다시 풀이하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의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현상과 모든 존재는 "
인연(緣) 따라 생긴다(起)".
연기의 기본공식은 초기경전인 아함경에 표현된 대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로서
아주 간결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불교)은
인간과 일체중생의 생ㆍ로ㆍ병ㆍ사ㆍ우ㆍ비ㆍ고ㆍ뇌의 모든
"고통"에 대한 근본적이고 세상에는 다시없는 최상의 치유책입니다.
네란자라(니련선하) 강가의 보리수 나무 아래에 평평한
돌이 있었습니다.
그 돌위에 부드럽고 깨끗한 풀을 푹신하게 깔고 앉은 한 사나이는
"도를 얻지 못하면 이 자리에서 죽으리라"는 굳은 결심을 하였습니다.
풀 방석(금강보좌) 위에 앉아 선정에 든 채 밤을 새우며 고통의
원인을 끊임없이 추적하던 이 진리의 영웅은 마침내 고통의
최초원인으로 진리에의 무지 즉 무명을 발견하였습니다.
바야흐로 새벽별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인류역사상 아니 우주 역사상 최대의 영웅(大雄)이랄 수 있는
이 사나이는 무수한 생 동안 그를 가두어두었던 생사의 감옥을
부수는 계기를 맞았습니다.
고통의 근원은 무지였습니다.
고통을 준 범인은 바로 연기법의 실상을 직시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무명(無明)이었던 것입니다.
무명은 자아와 타아를 나누고, 존재와 비존재를 나누고,
영혼과 육체를 나누고,
세계와 자신을 나누는 분별심의 근원이었습니다.
이렇게 나누고 차별하는 마음은 좋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갈망과
집착을 품고, 나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혐오와 편견을 불러일으키고,
이렇게 자꾸만 연기하여 일어나는 집착과 혐오가 마침내 거대하고
견고한 생사윤회를 만들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타! 마 싣다르타라 불리던 이 사나이는 깊은 선정 속에서
모든 것이 연기하는 도리를 관찰하여 무명을 멸함으로써,
무명이 연기해 놓은 모든 생사윤회와 번뇌를 멸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어둠은 빛이 비치면 흔적없이 사라져버립니다.
어둠이 사라지면 저절로 밝음(明)이 드러납니다.
이 밝음이 원래의 실상이자 여여한 진리의 실상이었던 것입니다.
이 위대한 영웅(大雄)은 마왕 마라(Mara)의 협박과 핍박,
그리고 미녀들의 유혹을 정복하고 마침내 미증유의
증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을 이루었습니다.
성도(成道) 직전의 마왕의 핍박은 마지막 남은 습의 정화를
상징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형언할 수 없는 기쁨(法悅)속에 젖어 며칠을 보내신 후,
법열의 자리로터 부처님은 몸을 일으키셨습니다.
다시 중생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는 자비의 빛이 움직이가
시작한 것입니다.
범천의 권유 때문에 중생에게로 돌아오셨다는 신화는 아름다운
이야기이기는 할 망정 부처님에 대한 진실은 아닙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삶의 진짜 의미를 모르고 살아가는 중생들을
어떻게 밝은 세계로 이끌어낼 것인가에 대한 고심이 범천(梵天)의
권청신화로 상징되어 나타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기경전에 나타난 가장 단순한 연기법은 12연기법이지만,
이 연기법은 훗날 상좌부불교에 반기를 들고 출현한
대승불교에 의해 더욱 더 심화되어졌습니다.
반야공(중관사상)이나 유식학 등도 모두 연기법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현재 접하고 있는 불교에는 그러한 알맹이가 사라지고,
대신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알음알이, 논쟁을 위한 논쟁,
공을 위한 공, 깨달음을 위한 깨달음으로 생각들이 흘러가는
현상들이 항상 안타까왔는데, 오늘 이렇게 무거운 마음을
털어내니 얼마간은 홀가분합니다.
단순한 것은 심오합니다.
부처님을 졸졸졸 따라다니며 시봉하던 제자 아난이 말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연기법은 그렇게 심오한 뜻이 없는 듯 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그런 말하지 말아라. 연기는 매우 심오한 법이니
보통 사람이 능히 깨칠 수 있는 법이 아니다."(증일아함 46권)
이 연기법 속에서 오온ㆍ12처ㆍ생로병사를 여의는 모든 법이
모두 짜여지게 되고, 인과법칙ㆍ인연화합ㆍ모든 불교적 개념들이
연기법 속에 포섭되는 것입니다.
또한 연기법은 중도(中道)의 이론적 근거가 됩니다.
세간의 집(발생)과 멸을 바로 보면 유ㆍ무의 분별심을 여의게
되는 것입니다(잡아함 10권).
또한 연기법은 인과응보 또는 업보라는 인간존재의
법칙이 되어 나타납니다.
또한 연기법은 인연화합으로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흘러가는 우주의 존재법칙이 되기도 합니다.
연기법에서 말하는 일체존재의 상의상관성
(서로 의지하고 서로 관계맺음)은 "관계" 속에서만 우리의 삶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달라이 라마가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삶의 터전인 환경과 지구의
생태계에 대해 전세계에 끊임없이 호소하고 있는 "보편적인
책임의식"의 근거도 바로 이 상의상관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만이 인간이 됩니다.
관계가 없다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오취온이 일시적으로
머무르는 집합체에 불과합니다.
관계가 멀어질 때 우리는 슬픕니다.
관계가 다가올 때 우리는 기쁩니다.
당신이 존재하지 않을 때 나의 ! 존재도 사라집니다.
당신이 바라볼 때 그것은 거기에 존재합니다.
당신이 바라보지 않을 때 일체존재는 사라집니다.
까마득히 먼 별이 태어나서 죽었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존재합니다.
당신의 고통은 나와 무관하지 않으며, 나의 행복도 당신의
도움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영혼이니 생명이니 하는 것도 불교에서는 연기법에 의한
오온(색ㆍ수ㆍ상ㆍ행ㆍ식)의 인연화합에 의해 일시적으로
생겨난 것으로 봅니다.
영혼이나 생명은 영구 불변한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에 의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나 생명을 다룰 때 중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영혼의 실체가 아니라,
업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도 연기법에서 나옵니다.
현대문명에서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인간복제의 문제도 영혼의
실체성 여부가 아니라, 인간이 짓는 업과 그로 인하여 인간이 받을
과보를 받는 카르마의 측면에서 검토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속담은 연기법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속담입니다.
당신이 볍씨를 뿌리면 달과 별과 물! 과 바람과 태양과 당신의 땀,
기타의 모든 것이 인연화합하여 벼를 키워 마침내 추수하게 만들며,
그 볍씨는 다시 인이 되어 다른 과를 만드는 과정을 겪습니다.
선인(善因)을 심으면 선과(善果)를 얻습니다.
악인을 심으면, 그 결과를 받아야 합니다.
연기법은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해지는 것이 아닌 엄연한
흐름 속의 법칙입니다.
책임을 지지 않으려면 애초에 책임질 원인행위를 하지 않아야 하며,
어떤 행위를 했을 때엔 당당히 그 결과를 수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달이 지구를 돌면서 밀물과 썰물이 생겨납니다.
만약 당신이 바닷가에 의지하여 사는 어부라면 밀물과 썰물의
흐름에 맞춰 어부의 삶을 영위해 나가야 합니다.
보름달이 뜨는 팔월 한가위는 가족들이 모여 조상께 감사를 올리고
서로간의 애정을 확인합니다.
태양과의 관계 속에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이 생겨납니다.
당신의 그 일상적 삶 속에는 당신과는 전혀 무관한 듯 보이는
달과 태양, 심지어 우주의 가장 먼 곳에 있는 원자 알갱이 하나도
관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현대식 교육이 전문가양산에만 초점! 을 둘 뿐,
전인교육으로 흐르지 못했기 때문에 청소년범죄가 급증합니다.
종교가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더욱 더 소외되어 가고,
물질과 문명의 노예가 되어 갑니다.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한 인간의 마음속?자비의 서원을 세우고 관세음보살의 마음을
구현시켰기에,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이 됩니다.
일체중생, 심지어 지옥중생까지도 모두 다 구제하지 못할 바에는
결코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당신이 서원하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당신 자신이 바로 지장보살의 화신이 됩니다.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연기하는 현상은 본질적으로 공입니다.
그럼에도 굳건한 실체로 여기는 마음은 전도된 망상이자,무명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신신당부하신 제일의 급선무가 바로
무명의 제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 무명을 걷우어 내고 밝은 천지에 나서서 "空 속의 연기", 즉
"텅 빈 충만", "본래무일물", "본래청정"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옮긴글]
부처님 참뜻을 깨달으시어 "참 나"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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