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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행스님─ 인욕과 보시의 삶은 좋은 인연 만드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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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각원사
댓글 0건 조회 188회 작성일 14-06-04 15:05

본문

  인욕과 보시의 삶은 좋은 인연 만드는 길    
  
                      범행스님 (팔달선원 조실)


“대신심·대의심·대분심으로
‘도 깨닫고 말겠다’ 서원 지니고
수행할때 깨달음이 다가옵니다”

[약력]
·1921. 2. 21(음) 경기 화성 生
·48년 금산 태고사에서 포산스님을 은사로 출가
·52년 선학원 팔달선원 원장
·64년 선학원 원장
·71~75년 대한불교신문 사장
·74~90년 선학원 이사장
·79~80년 부산 금정선원 원장
·조계사, 동화사, 불국사, 수덕사, 봉은사 주지 역임
·現 수원 팔달선원에 주석.


구름은 한가로이 하늘 가득 들고나니(出入雲閑滿太虛)
원래 참된 상은 한 티끌도 없구나(元來眞相一塵無)
거듭거듭 서쪽에서 오신 뜻 물으니(重重請問西來意)
오직 마당에 있는 잣나무만 가리킬 뿐(唯指庭前一栢樹).

달마대사가 전한 법은 말과 문자가 문득 끊긴 ‘불립문자 언어도단’(不立文字 言語道斷)의 진리입니다. 본래 법이라고 이름 붙여서 설한다는 그 자체가 잘못입니다.
입을 열면 이미 잘못 된 것(開口則錯)이지요.
명(名)과 상(相)에 사로잡힌 것이지요.그래서 누가 내게 “불교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언어도단에 심행처(心行處)가 멸(滅)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법문을 잘 하지 않아요. 하더라도 미리 준비하지 않고 그때 그때 대중들의 얼굴을 쳐다보고 근기에 맞는 떠오르는 말을 할 뿐이지요.
법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인데 새삼스레 말씀드릴 게 뭐가 있느냐 이 말이죠.
살아가면서 느끼는 모든 것이 법문 아닌 것이 없어요. 온 세상과 우주에 법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 무슨 신통한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49년간 설법후 열반하시면서 “나는 아무것도 설한 것이 없다”고 하신 말씀의 뜻이 여기 있습니다. 성철스님 역시 열반송에서 “평생 많은 사람들을 속였다”고 한 것이 이 뜻입니다. “원래 얻을 것이 없으며, 줄 것도 알 것도 깨칠 것도 없는데 무엇을 설할까 보냐” 이런 의미지요.
법문이란 것도 그 사람의 근기에 맞아야 지혜의 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그릇에 ‘발 씻은 물’, 꿀, 밥, 오줌을 넣으면 오물통, 꿀단지, 밥통, 오줌통으로 이름이 바뀌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 사람에 맞는 방편을 설할 때 ‘참 법문’이 되는 겁니다.

한 생을 버려서라도 안되면 누생을 버려서라도 반드시 도를 깨닫고 말겠다는 굳은 서원을 지니고 수행할 때 비로소 깨달음이 다가옵니다. 그때는 조금만 일러 주어도 ‘법의 문(法門)‘이 열리고, 심지어는 돌부리에 채여도 깨닫는 것입니다.
결국 법이란 자기가 노력해서 스스로 얻는 것이지, 남이 떠다 먹이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수행 체험담이 오히려 도움이 될 것도 같습니다.
수행의 3요소는 잘 알다시피 대신심(大信心), 대의심(大疑心), 대분심(大忿心)입니다. 나의 경우는 신심으로부터 수행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생겼습니다.

나는 남들보다 늦게 출가를 했어요. 집안이 넉넉해서 화학공장을 경영하는 등 다양한 사업을 해 보았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나이가 들어도 술·담배도 하지 않았고 세속적인 즐거움에는 초연한 편이었어요. 평소 몸이 약해 결혼도 하지 않았지요.
그러다가 공장에서 염소가 터지는 바람에 폐가 나빠졌어요. 당시 폐병에는 약이 없어서 시한부 인생이나 다름없었죠.

요양이나 할 생각으로 금산 태고사를 찾았어요. 그때가 28세. 태고사에는 나의 첫번째 은사가 되신 포산(飽山)스님이 계셨어요.
포산스님을 뵙고 토론을 많이 했습니다. 나는 당시 아리스토텔레스 전집 10권을 숙독하는 등 철학과 문학에 나름의 소양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던 터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처음 불교를 접하다보니 호기심도 들고 지적인 욕구도 강하던 터라 토론은 2주일 정도 계속되었어요. 결과는 내가 읽고 들은 철학·문학이 불교에는 필적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예요.
철학·문학 등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그 위대하다는 서양의 대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도 윤리도덕 정도의 가르침이었어요.

스님과의 대화를 통해 내 병이 업력으로 인해 생겼음을 알았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 역시 공업(共業)임을 알게 되었어요.
스님은 업장을 소멸하고 건강을 찾고 싶거든 ‘불정심관세음보살모다라니’를 열심히 외우라고 하시더군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정성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잠도 안 자고 앉아서 부지런히 외웠어요. 아침·저녁엔 옆방 스님들과 참선도 같이하면서 약 5주 동안 일심으로 모다라니를 외웠습니다.

하루는 다라니를 외우고 있는데 비몽사몽간에 유명한 일본인 내과과장인 나리 타가 나타났어요. 내몸 이곳 저곳을 검진하고나서 “다 나았다. 아주 기쁘다”고 말하더군요. 이 때 앉은 채로 꿈이 깨었는데, 날아갈 듯이 몸이 가뿐했어요. 문득 무언가 먹고 싶다는 생각에 40리나 떨어진 연산시장으로 뛰어내려갔어요.
그전에는 입맛이 없어서 공양도 겨우 했는데, 시장에서 국수 떡 등을 배불리 먹었어요. 그러고 나니 기운이 솟는게 몸이 나은 것을 느꼈지요. 불법의 위력을 처음으로 실감한 순간이었어요.

부처님의 가피를 체험한 후 포산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습니다.
포산스님은 앉아서 10리 밖의 일을 보고 듣고 하실 정도록 도가 높았어요.
포산스님은 ‘옴마니반메훔’ 6자대명왕진언을 외우셨는데, 모다라니를 계속 외웠어요. 스님에게서 주력수행법과 함께 생식·벽곡 등을 하는 신선도를 배우기도 했어요.

당시 태고사에는 5명의 스님이 계셨는데 모두 개성이 강하고 수행에 열심이었어요. 숙명여대 교수를 지낸 정남조 스님과 땡초라고 자임하던 스님, 한학자 출신 스님등 모두 학식도 높고 배울 점이 많은 분들이었어요. 그중 땡초스님은 묵언정진으로 ‘벙어리 시늉’을 계속 했어요. 나는 그걸 따라 해 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어렵더군요. 얼굴도 안 변하고 벙어리 흉내를 내는 것이 묵언정진보다 수십배나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 스님에게서 ‘탁발(托鉢)은 저렇게 하는구나’를 배웠지요.

6.25전쟁 때는 거지 생활을 곧잘 했습니다. 여름에는 남산에, 겨울에는 한강변에 움집을 지어놓고 거지 생활을 했어요. 솥단지를 걸어놓고 깡통에 담아온 음식을 모두 넣고 끓여요. 그러면 병도 안 생기고 참 맛있어요. 나는 부잣집에 태어나 잘 먹고 호강하며 지냈지만 깡통에 든 밥을 먹으면서도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어요. ‘일체유심조’라는 진리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가난한 사람일수록 없는 살림에 먹을 것을 나눠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부자는 인색한 것으로 부자가 되는가 보다’했지요. 탁발은 수행을 방해하는 가장 큰 독소인 아만과 아집을 없애고, 보시하는 이의 복덕을 길러주는 공덕이 있음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1953년경에는 서울 선학원에서 당시 조실로 계시던 금오스님을 은사로 모시게 되었어요. 당시 만암스님이 종정으로 계시면서 수행승(비구)과 교화승(대처)의 거주 사찰 지정문제로 종단내의 의견 대립이 심각했습니다. 이해 8월 선학원에서 열린 제1차 수좌대회가 파한 뒤 효봉, 동산스님 등과 함께 정화의 실천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지요.

금오스님은 늘 나보고 참선하라고 하셨는데, 나는 당시 주력수행에 몰두하던 터라 참선이 잘 되지 않았어요. 몇년 뒤에는 마곡사 토굴에서 정진했는데 주력을 통해 삼매나 정(定)에 드는 것이 익숙해졌습니다. 마치 참선을 할 때 화두를 참구하듯이 항상 외우면서 수행의 요체로 삼았지요. 마곡사 토굴에서 1년정도 지냈는데 느낌이 이상해 내려가 보니 정화운동이 시작되었어요. 봉은사 주지 등을 맡으며 정화운동에 참여했어요.

당시 선학원에는 경지가 높은 쟁쟁한 스님들이 많아서 자극을 많이 받았습니다. 동산스님은 복이 많은 분이었고, 효봉스님은 덕이 많은 분이었어요. 금오스님은 당시에는 보기 드물게 동진출가한 청정 비구이셨죠. 큰스님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화두는 어떻게 드느냐 하면 일체 경전을 다 본 후에 의심을 내라’는 등의 결론을 내렸어요.

그러던 중 1968년 10월8일에 금오스님이 세수 73세로 입적하셨어요. 이후에는 선학원 이사장으로 계시던 혜암스님을 모시고 공부를 했어요. 혜암스님은 어디서나 설법하여 사람들을 교화하셨어요. 70세가 넘도록 매일 새벽 108배의 참회예불을 중단하지 않으셨죠. 특히 신도나 청소년을 대할 때마다 신의와 효도를 강조하여 도의(道義)재건운동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혜암스님 역시 나를 참선으로 이끌기 위해 애를 쓰셨어요. 하루는 스님께서 <반야심경>에 대해 물으며 ‘부처 불(佛)자 보다 더한 곳이 있으니 일러라’ 하셨는데, 나는 답을 못했어요. 그로부터 ‘내가 안다는 게 아무것도 아니구나. 주력수행만 해서는 안되겠구나’ 느꼈지요.

그때부터 참선수행에 본격적으로 몰두했는데 <반야심경>의 이치를 깨칠 수 있었어요. ‘마음이 곧 부처(心則是佛)‘ 임을 확신하게 된 것이예요. 혜암스님은 <반야심경>에 대한 나의 답변이 옳음을 인가하고 ‘효일(曉日)’이란 호와 전법게를 내리셨어요.

은산철벽이 터지면 화두가 술술 풀려요. 경전과 선어록을 봐도 모르던 부분이 저절로 환하게 됩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별 것 아닌 것이 수행자들을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오도의 세계’ 첫 관문을 통과한 뒤에는 ‘놓고 쉬는’ 공부를 해야 해요. ‘내가 깨쳤네, 내가 큰 스님입네’하는 상을 일체 버려야 해요.

참선이란 것은 본디 내 마음자리를 바로 보는 거예요. 거울의 때를 벗기면 자기 얼굴이 환하게 보이듯이 본래 나만 남는 거예요. 그 경계에 들어서면 춤도 춘다고 하지만, 그때부터가 중요해요. ‘안다고 하는 그 생각’ 마저 버려야 해요. 백양사의 서옹스님처럼 무심도인(無心道人)이 되어야 해요. 참도인은 어린애처럼 즐거울 뿐 아무런 상이 없는 거예요. 보림(保任·保護任持의 준말로 깨달은 이가 그 경지를 잘 보호해 지켜가지는 것)이란 게 딴 게 아니예요. 수억겁 동안 쌓인 습을 지워내는 작업이예요. 미세한 식·색·명·리(食色名利)·잠 등 오욕락을 제거하는 것이지요.
죽을 때까지 쉬지 않아야 해요.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배부르게 먹으면 성욕이 발동하고, 권력을 잡으면 재물을 모으려 해요. 그래서 밥을 적게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지요.

50여년의 수행으로 얻은 결론은 ‘절대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마거사의 불이법문(不二法門)과도 같은 것이죠. 선악과 생사 등 모든 가치는 둘이 아니요, 그 어떠한 것도 절대성을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의 상대성원리를 발표했지만 불법은 정신과 물질, 모든 것이 절대성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이 보는 선악 등 온갖 분별이 절대성을 갖지 못해요. 정치인들 때문에 나라가 이 지경에 처했다고 탓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예요. 그렇게 될 만한 이유가 쌓여서 그렇게 된 것이란 말이지요. 누구의 잘 잘못을 따질 필요가 없어요. 오욕락이 쌓이고 탐진치가 모여 벌어진 일이니까요. 업력으로 주고 받는 것이기에 연기론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좋은 인연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착하게 인욕과 보시를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온갖 나쁜 일 저지르지 말고, 모든 착한 일을 두루 행하라. 스스로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그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니라”는 일곱 부처님의 공통적인 계율, 즉 칠불통계(七佛通戒)가 불법 수행의 요체를 함축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정화 당시 효봉스님의 사제인 향봉스님이 조계사 법당 안에서 모 스님과 서로 주지를 안 맡겠다고 싸워 재판에 회부된 적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언론에서도 청정 비구의 무소유 정신의 상징으로 대대적으로 보도했어요. 이것이 발단이 되어 정부쪽에서도 비구측의 손을 들어주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정화가 끝나고 40년도 안 되었는데 당시의 청정비구의 서슬퍼런 지계의지가 많이 희석되지 않았습니까. 무소유 정신도 약해지고 호사스런 생활로 불자들의 비판을 받는 스님마저 생겨나고 있습니다. 선각들의 훌륭한 전통은 잊어버리고 불교가 형식화 되어가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수행의 전통을 되살려야만 우리 사회를 이끄는 정신의 고향으로 불교가 거듭날 수 있습니다. 이점 명심하시고 불자들은 ‘참 자기’를 찾는 일대사에 진력하시기 바랍니다.

[현대불교신문 김재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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